제목 | < 2017년 시무식 이태원 대표님 신년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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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7.01.03 | 조회수 | 2135 |
<2017.01.02 태원세무법인 이태원 대표이사 신년사 >
우리의 삶속에서 실패의 경험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고, 떠올리기조차 어려운 실수들을 하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살아 갈 수 있는 것은 내일이면 다시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기 때문이며 새로운 날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새로운 2017년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과거는 그저 역사로 남을 따름입니다. 현재 나라의 혼돈과 경제의 어려움, 또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해결할 수 없는 지금의 문제들 또한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해결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누군가 걱정하고 있는 일의 80%이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많은 통계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설사 걱정하였던 일이 일어난다고 하여도 그것은 우리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기 위한 준비라 생각하여 봅니다. 21세에 사업실패, 22세에 변호사 시험 낙방, 26세에 사랑에 빠졌으나 애인이 사망, 27세에 신경쇠약에 걸림. 36세에 국회의원 출마 낙선, 45세에 국회의원 낙선, 47세에 부통령 지명전에서 실패, 52세에 마침내 미국 대통령에 당선, 바로 미국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의 경력입니다. 링컨의 삶은 그야말로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였습니다. 스물 일곱 번 인생의 실패를 거쳐 스물 여덟 번째로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링컨의 경우는 그의 실패가 오히려 성공의 기틀을 닦아 주었다고 하겠습니다. 과학기술대학에 이현우란 학생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검정시험을 쳐서 과학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과학고 2학년 때 검정시험을 쳐서 과학기술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열다섯살 때 였습니다. 그가 과기대에 들어갔을 때 최연소로 합격자라고 신문보도까지 났습니다. 그러나 아깝게도 아파트에서 떨어져 자살하였습니다. 열아홉살의 나이였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학생의 경우는 어려서부터 성공만 계속 하다가 갑자기 실패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초기의 성공이 그 학생한테는 비극이였습니다. 오히려 실패하면서 자랐더라면 천재성을 꽃피워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2가지 분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즉 긍정론자와 부정론자입니다. 어떤 이는 자신에 대하여 불만족하고 가정과 직장에 대하여서도 불만족합니다. 나아가서는 국가와 이 시대를 부정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발전을 이끌었던 자는 행동하는 긍정론자였고, 미래를 준비하였던 자들이 이 시대를 지금도 이끌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사회의 부정적인 면들이 있었고, 누구나 말 못할 고민과 괴로움을 안고 살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장님은 수백억의 자산가이며 70세 넘었지만 건강하시고, 사업체는 많은 이익이 나지만 40대 중반의 아들이 결혼을 하지 못하는 관계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또한 어떤 이는 의사로서 큰 명성과 재물을 얻었지만 부인과 갈등 때문에 고민하고 있으며 소위 말하여 졸혼을 한 상태이다. 어떤 이는 모든 사항이 좋으나 자식이 다운증후군으로 늘 마음에 부담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 가운데에서 완전한 자유로움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재 나라가 혼란스럽고, 국정 공백이 있으니 이민을 간다고 하는 것만이 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자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연을 끊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갈등이 증폭되어 이혼을 한다면 아마 대한민국 부부중에 50~60%는 이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나라를 지켜야 하며 자식을 사랑하여야 하며 가정을 깨지 않고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자체가 그렇게 불완전하게 만들어져 있는 존재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직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직장생활이 즐거워야 합니다. 막심 고리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이 즐거우면 인생은 낙원이고, 일이 의무라면 인생은 지옥이다」 그런 면에서 직장에서 소외되고 있는 사람들의 인생은 지옥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책은 나와 있습니다. 긍정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이 중요합니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최근에 한국 철학계의 거목이시며 제가 젊은 시절 많은 수필집과 방송에서 우리에게 좋은 말씀으로 격려하여 주신 연세대학교 김형석 교수님의 「백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중에 크게 감명 받은 몇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흑과 백 사이의 수많은 회색」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노교수님께 한국학을 전공한 교수가 질문하기를 ‘우리 민족성 가운데 가장 시급하게 고쳐야 할 단점이 무엇이라 생각 하십니까’라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노교수님께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절대적 사고방식을 뒷받침 하는 흑백논리입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학자들은 조선왕조 500년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온 것은 유학인데, 유학 중에서도 주자학 같은 형식논리를 추구하는 동안에 흑백논리가 민족적 전통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진보냐 보수냐를 따지고, 여당이냐 야당이냐를 편을 가르고, 중도에 있는 사람은 양쪽에서 회색분자라고 욕을 먹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저는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제3의 길이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안에 따라서 진보도 될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보수도 될 수 있는 융통성이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편을 갈라서 내편이 아니면 적이고 시중에 일관성 없는 정치 지도자의 주장에 무조건 따라가는 주체성 없는 그러한 사고는 정말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노교수님의 의견은 완전한 흑도 완전한 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밝은 회색이 백에 가깝고 어두운 회색이 흑에 가까울 뿐입니다. 성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생각, 여태까지 살아온 환경, 주변 사람들 등에 영향을 받아 스스로의 가치관이 나름대로 성립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와 조금 다르다고 무조건 백안시 한다거나, 나와 조금 다른 주장에는 무조건 귀를 막고 배척하는 모습만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완벽한 백도 완벽한 흑도 없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가지고, 융통성 있고 열려 있는 생각을 하는 것이 이 혼란스럽고 어려운 국내 정세 속에서 이 한해를 살아감에 오히려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00세 시대라는 말을 요즘 언론이나 인터넷 등에서 입버릇처럼 쓰고 있습니다. 실제로 의학의 발전 속도와 추이를 볼 때 여기에 계신 저와 여러분이 이제는 100세를 평균 나이로 향유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여러분께서는 그저 오래 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모두들 생각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100세라는 이 소위 한 세기를 우리가 어떻게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비결이 우리가 매일 접하는 일과 직장에 있다고 노교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노교수님은 현재 98세 이십니다. 그러나 지금도 하루에 30장 내지 50장의 원고를 자필로 매일 쓰고 계시며 지금도 60분 정도는 서서 강의를 하신다고 합니다. 그러한 에너지가 어디서 나왔을까 하는 생각을 하여 보면 그것은 건강한 정신에서 나왔다고 판단됩니다. 그 책에 이러한 글들이 쓰여 있습니다. 흔히들 노년기는 보통 65세부터 시작된다고 이야기하는데 이 교수님의 생각은 75세 내지는 80세부터 노년기가 시작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성장하는 동안은 늙지 않습니다. 노력하는 사람들은 75세까지는 정신적으로 인간적 성장이 가능합니다. 신체가 쇠약해지면 늙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생각은 동물적이거나 생리적 관점입니다. 신체적 성장은 여자는 22세까지이고 남자는 24세까지라고 합니다. 그 이후로는 서서히 하강하는 것이 신체적 과정입니다. 그러다가 40대가 되면 성인병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누구나 늙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신적 성장과 인간적 성숙은 그런 한계가 없습니다. 노력만 한다면 75세까지는 성장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교수님은 오래전부터 인생의 황금기는 60에서 75세 사이라고 믿고 있다고 합니다. 75세까지 나름대로 공부하고 일하며 어느 정도는 창의적인 성장을 해왔기 때문에 그 이후에 창조적인 노력이나 성장은 불가능하더라도 그 성장해 놓은 수준은 유지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80쯤의 나이가 되었을 때 스스로 질문하여야 합니다. 나는 과연 성공했는가? 지금도 행복하다고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가? 그래도 존경스러운 삶을 이어 왔는가? 지금도 우리 사회는 너무 일찍 성장을 포기하는 젊은 늙은이들이 많습니다. 아무리 40대라고 해도 공부하지 않고 일을 포기하면 녹스는 기계와 같아서 노쇠하게 됩니다. 차라리 60대가 되어서도 진지하게 공부하며 일하는 사람은 성장이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실한 노력과 도전을 포기한다면 그는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됩니다. 80쯤 되면 모든 사람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스스로 나는 행복했다고 인정하며, 주변 사람들이 존경스러운 일생을 살았다고 평가해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스스로 쓸모없는 일생을 살았다는 부끄러움을 깨닫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회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다는 자책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50부터는 80이 되었을 때 나는 적어도 이러한 삶의 조각품을 완성해야 한다는 준비와 계획과 신념과 꾸준한 용기를 갖고, 제2의 마라톤을 달리는 각오로 재출발하여야 합니다. 장수의 비결에 대하여도 노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는 일이 내 건강을 유지해 주었다고 믿고 싶다. 지금도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고 있다. 일을 하기 위해서는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운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수님은 20세가 될 때까지는 항상 건강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건강을 위해서 신체적 과로나 무리는 하지 않았답니다. 그것이 습관이 되어 지금도 신체나 정신적 무리는 하지 않는 것이 장수의 비법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50고개를 넘어서야 정상적인 건강에 자신을 찾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도 할 수 있는 일의 90%까지만 책임을 맡아서 10%정도는 항상 여유를 남겨 둔다고 합니다. 지금도 일주일에 3일쯤은 수영장을 찾아 수영을 하고 시간이 허락 되는대로 걷기 운동 등 산책을 하며 교통수단은 늘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하므로 늘 걷는 것을 생활화 하십니다. 건강하여야 일을 할 수 있고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장수하는 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철학자 칸트는 80년을 살았습니다. 300년 전에 80세까지 살았다면 장수한 셈입니다. 그는 왜소하고 건강에 있어서는 열등생이었습니다. 산책 외에는 운동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무엇이 그의 건강을 지탱했느냐면 학문에 대한 열정과 일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칸트를 나귀와 같이 많은 짐을 지고 살았다고 평합니다. 그러나 그는 무거운 학문의 짐을 지고 80평생을 건강하게 보냈습니다. 바로 일이 건강을 유지해 준 것입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는 하루에 몇 시간밖에 수면시간을 갖지 않았습니다. 정신적 일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90을 넘길 때까지 일에서 손을 놓은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60년간 환자들을 위해 일할 수 있어 누구보다도 행복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뚜렷한 목적을 갖고 있는 사람과 아무 목적도 없이 사는 사람이 같을 수 없습니다. 목적이 있는 사람은 일을 할 것이요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노년에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그래서 노후에 일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말에 또 다른 책을 보면서 느낀 큰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아킬레스건과 같은 약한 부분은 어찌 되어도 제거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가장 위대한 예수님의 사도였던 바울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예수님 다음으로 위대하고 영향력이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의 손수건을 죽은 사람의 얼굴에 얹어도 죽은 사람이 살아나던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가지고 있는 불치의 병이 있었습니다. 간질이라고도 하고 안질이라고도 하는 병이었습니다. 그 병을 낫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3번을 간절히 기도 하였으나 거절당했습니다.(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그 이유는 그 병 때문에 교만하지 않고 더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부분만 해결되면 나는 행복할 것 같은데, 수십년간 노력도 했고, 기독교인으로서 기도도 했습니다. 그러나 해결되어지지 않더라구요. 아마 죽을 때까지도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깨달았습니다. 내가 국적을 미국으로 바꿀 수 없듯이 얼굴을 성형해서 송중기나 박보검처럼 될 수 없듯이 거의 불가능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운명이라고도 합니다. 왜 내 얼굴은 이렇게 생겼을까? 나는 왜 머리가 나쁠까? 내 부모는 나에게 재산을 물려줄 형편이 못 되었나? 좀 더 능력있고 성격 좋은 남편이나 아내를 만나지 못하였나? 그러나 이러한 질문의 답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섭리”라고 종교적인 답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불평한들 소용없습니다. 현재의 형편에 대하여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섭리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불편하게 생각되어지는 상황에 대하여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지혜인 것입니다. 저는 미련하게도 이 사실을 최근에 깨달았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불편한 사실이나 상황이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이나 형제간의 불화, 외모 콤플렉스, 학력 콤플렉스, 부부간의 갈등, 자녀에 대한 불만, 직장에 대한 불평, 국가나 사회에 대한 불만,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하여 갈등하거나 원망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지는 것입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여, 긍정적이고 즐겁게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삶에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오늘날 사회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또한 여러분 자신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주변의 사실들에 대하여 인정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그것들을 변화 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백년을 살아보니」의 책은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내용을 그대로 연장하면 된다는 사람이 있다면 긍정적인 인생을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살아야겠다는 자기반성이 있다면 늦기 전에 삶의 내용과 의미를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이기적인 생활을 해 온 사람은 더불어 살면서 나누고 베푸는 삶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물질적인 소유를 위해 살아온 사람은 정신적인 가치를 위해 삶의 지평을 높여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가치판단은 누가 내립니까? 우리가 죽은 후에 우리의 삶을 계승하는 후대들이 평가해줍니다. 즉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를 묻고 그 대답에 걸맞은 삶을 찾아 노력해야 합니다.
셰익스피어를 존경했기 때문에 영국을 우러러보는 사람들. 빅토르 위고의 작품을 읽었기 때문에 프랑스가 좋아진 사람들. 괴테를 사랑했기 때문에 독일 문화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개인이 남겨준 정신적 유산이 그의 조국을 영광스럽게 높여 줍니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람보다도 인류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같은 시대에 우리 주변에서 같이 지냈다면 위대함을 몰랐을 정도로 평범하게 사신 분들입니다. 공자, 석가, 예수,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기업가도 정치가도 아니었고, 학자나 예술가도 못 되었습니다. 우리와 큰 차이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공자나 석가는 존경받는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나 소크라테스는 범죄자의 낙인을 받고 사형에 처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을 사랑받고 감사의 대상이 되는 인간으로 만들었습니까? 그들은 한사람 한사람의 인간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 컸기 때문에 인간 모두에게 뻗칠 수 있는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술이나 학문의 업적은 남길 수 없어도 이웃에 대한 사랑의 봉사는 할 수 있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꼭 돈으로 하는 것만이 사랑은 아닙니다.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가서 노력 봉사하는 것도 사랑이지만 길을 묻는 이웃에게 친절히 안내하는 것, 노약자나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 직장에서 어려움에 처한 동료의 아픔을 같이 걱정하여 주는 것도 이웃사랑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 라고 물었을 때 대답은 사랑을 나누어주는 삶인 것입니다. 그보다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그 사랑이 귀하기 때문에 높은 사랑은 죽음까지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의인) 인간은 누구나 작고 큰 사회에서 태어나 살다가 사회를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키워준 사회에 해악을 남기지 말고 작더라도 선한 도움을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삶의 한 모퉁이에서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입니다. 큰일을 하자는 것도 아니며 해야 할 일을 하자는 뜻입니다. 동물들도 자기 새끼나 가족은 위합니다. 동물처럼 자기 가족만 사랑하다가 가기에는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 아까운 인생입니다. 2017년 삶의 흔적을 사랑으로 남길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